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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이야기

[조선왕릉] 조선 21대 왕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 이야기..!!

by 하르방 스토리 2024.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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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이야기 : 원릉(元陵)

원릉은 구리시 동구릉에  일곱 번째로 조성된 조선 제21대 왕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합장릉입니다. 동구릉은 조선 왕릉 중 가장 큰 규모로 17명의 왕과 왕비가 모셔져 있는 9기의 능이 있습니다. 원릉은 조선 후기 정치적 격변기와 왕실 권력의 성격을 보여주는 조선왕실 역사의 중요한 능입니다.

 

 

 

 

원릉의 역사적 배경

영조는 생전에 정비 정성왕후가 묻힌 남양주 홍릉에 묻히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가 현 위치에 능지를 정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조는 1776년 승하하여 7월 27일에 현 위치에 안장되었으며, 계비 정순왕후는 원릉을 조성한 지 29년 후인 1805년(순조 5) 6월 20일에 영조 옆에 안장되었다. 현 원릉의 위치는 원래 효종의 능인 영릉이 있었던 자리였으나 영릉은 1673년(현종 14)에 여주로 옮겨졌다.

 

원릉의 형식

원릉은 왕과 왕비가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봉분은 좌우에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난간석이 두 능을 감싸고 있으며 봉분을 감싸는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으며, 각 봉분 앞에 혼유석이 1좌씩 놓여 있고 혼유석 좌우로 받침에 꽃문양을 새긴 망주석 1쌍이 있다. 능침 주변에는 석양과 석호가 각 2쌍, 문인석과 석마가 각 1쌍, 장명등, 무인석과 석마가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이 능은 18세기 후반의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석인상의 얼굴은 온화하고 망주석의 세호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원릉은 조선 후기 왕릉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여주며, 능역이 비교적 넓고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왕릉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정자각과 홍살문, 신도비 등 능을 구성하는 주요 시설물들이 단정하게 배치되어 있어, 영조의 위엄과 정순왕후의 권세를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

정성왕후는 1693년 1월 2일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태어났으며, 1704년에 연양군(훗날 영조)과 혼인하여 1724년에 영조가 조선 제21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정성왕후로 책봉되었다. 조선 역대 왕비 중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왕비로서 어질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식을 낳지 못한 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고, 남양주 홍릉에 묻혀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정순왕후는 1745년 영의정 김한구의 딸로 태어았다.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노론 백파계 집안 출신으로 51세 연상인 영조와 혼인하여 계비가 되었다. 그녀의 혼인은 부부의 결합이 아니라 당시 왕실의 정치적 필요와 노론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66세인 영조와 나이 차가 많았으며, 오빠인 김귀주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여 정조 시대에는 수렴청정을 주도하고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등 정치적 변화와 논란적인 사건들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1805년 61세에 사망하였고 자식을 낳지 못했다.  

 

 

영조와 정순왕후가 남긴 의미

영조는 조선 후기 개혁 군주의 상징이면서,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있던 왕입니다. 그의 치세는 혼란한 정국을 어느정도 안정시켰지만, 왕실 내부 갈등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세상을 떠난 후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며 국정 운영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정치적 중심에 서며 왕실의 권력을 이어갔습니다. 이시기를 '정순왕후 섭정기'라고 부르며, 노론 벽파를 중용하여 정국을 장약했습니다. 그녀의 섭정은 순조의 왕위 계승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으나, 노론 일색의 정치 운영으로 인해 새로운 갈등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원릉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조선 후기 정치사의 권력 구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조선을 다스린 군주 영조와 권력의 중심에 섰던 정순왕후의 흔적을 마주하게 됩니다. 원릉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조선 후기의 정치적 무게와 왕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영조와 정순왕후의 삶이 지녔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떠올려 보는 것은 조선 왕조사를 이해하는 데  의미있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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