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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조선 18대 왕 현종과 왕비 명성왕후의 '숭릉' 이야기..!!

by 여니하르방 2024.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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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이야기 : 숭릉(崇陵)

숭릉은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건원릉, 현릉, 목릉, 휘릉, 숭릉, 혜릉, 원릉, 수릉, 경릉)의 다섯 번째로 조성된 조선 18대 왕 현종과 왕비 명성왕후 김씨의 능입니다. 

 

 

 

숭릉의 역사와 형식

현종은 1674년(숙종 1)  8월 18일 34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 양심각에서 승하하였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 남서쪽 산줄기에  팔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능을 조성하였고, 12월 3일  예장하였다.  명성왕후가 1683년(숙종 9)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 서별당에서 세상을 떠나자 현종 옆에 나란히 명성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능의 형식은 쌍릉으로 하나의 곡장안에 왕릉과 왕비릉을 나란히 조성하였다.  난간석이 두 능을 감싸고 병풍석은 없으며, 석양과 석호 각 2쌍과 망주석 1쌍, 장명등 1개, 문인석과 석마 각 1쌍, 무인석과 석마 각 1쌍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장명등과 망주석에는 인조의 무덤인 장릉의 석물에서 처럼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망주석 위쪽에 '세호'라고 불리는 작은 동물의 형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능 아래에 정자각과 비각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자각은 조선왕릉 40기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정전 5칸, 배위창 3칸으로 전체 8칸의 규모로 확대된 건물이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숭릉 정자각은 현종의 능을 조성하면서 같이 건립하였으며 건립 이후 몇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

1828년(순조 28)에는 정자각 월대를 개축하였으며 1879년(고종 16)에는 첨계석을 수리 하였다. 1899년(고종 36)에 배위청 기둥이 기울어 보수하였고 1997년에 해체 보수하였다.

 

조선 18대 왕 현종

본명은 이연(李棩), 효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인선왕후로 병자호란 후 아버지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볼모로 선양에 있을 때 태어났다. 조선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국외인 청나라에서 출생한 왕으로 왕비 명성왕후외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다.

 

현종은 1644년(인조 22) 청에서 귀국하여 1649년(인조 27)에 왕세손에 책봉되어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세자가 되었다.

이후 1659년에 왕위에 즉위하였지만 기해복제 문제라는 예론에 부딪치게 되면서 재위 15년 대부분을 예론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정쟁 속에서 지냈다.  기해복제 예론은 아버지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장렬왕후)의 상복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것이다.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한 것은 장자의 권위를 계승한 것이므로 장자의 예를 따라 3년을 주장하였고,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둘째 아들의 예에 따라 1년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서인이 주장한 기년설(1년설)을 채택했고, 이에 1차 예송논쟁은 서인의 집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674년(현종 15)에 어머니 인선왕후(효종의 비)가 승하하자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2차 갑인예송이다. 남인은 인선왕후가 왕의 비이므로 장자와 차자의 종법을 초월하여 1년을 주장하였고, 서인은 인선왕후가 둘째 아들의 비이므로 9개월 주장하였다. 현종은 아버지 효종이 차자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자와 다름없이 1년을 채택하는 것은 물론 1차 기해예송도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여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기용하였다.

 

이리하여 현종의 재위기간 동안 남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국력은 쇠퇴해지고 질병과 기근 등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현종의 주요 정책

현종은 기해예송, 갑인예송 양란을 겪으면서 흔들렸던 조선왕조의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선왕 효종이 추진해 오던 명분론적 북벌은 중단하고, 군비 강화에 주력하여 1669년 어명병제에 의한 훈련별대를 창설하였다.

 

1660년에는 국가의 재정을 늘리기 위해 호남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강화도의 정족산성에 새로운 사고를 마련해 역대 실록을 보관하게 했으며, 1662년 경기도에 양전을 실시해 세수를 확보하였다.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하여 동절활자 10만여 자를 주조시켰다. 1669년에는 송시열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이 같으면 본관이 다르더라도 혼인을 못하게 하는 동성통혼을 금했다. 곤장의 크기와 형태 및 재질을 바꿔 형장의 가혹함을 완화했고 유민을 단속하여 호적을 만들었으며 혼천의를 만들어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현종의 비 명성왕후

명성왕후는 조선 제18대 왕 현종의 비로 본관은 청풍이다. 1651년(효종 2)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송씨의 딸로 태어났으며, 현종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예송논쟁에서 남편을 지지하는 등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능이비상하고 총명하였으나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 현종이 후궁을 하나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서인 출신으로 남인과 대립하여 현종의 사촌인 안평대군의 세 아들(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삼복 형제와 대립하였고, 아버지 김우명과 홍수의 변을 일으켜 삼복 형제를 제거 하려다 실패하였다. 숙종이 총애하던 궁인 장씨(희빈 장씨)가 남인과 연통한다는 이유로 궁에서내쫓기도 했다. 정사 관여하여 노골적인 언사와 감정 표현 등으로 사가와 유림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참고로 현종의 비 명성왕후(김씨)는 고종황제의 정실인 명성왕후(민씨)보다 200년 전의 인물이며, '명성왕후 김씨' 또는   '명성대비'로 더 많이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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