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이야기, 오늘은 구리시 동구릉에 세 번째로 조성된 조선 14대 왕 선조와 두 왕후의 무덤이 있는 동원삼강릉 형식의 목릉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목릉이 동원삼강릉으로 건립된 경위
1600년에 선조의 비 의인왕후가 승하하자 경기도 포천 신평에 터를 잡고 산릉을 조성하였으나 터가 불길하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건원릉 동쪽으로 터를 다시 정하여 산릉을 건립하고 유릉이라 불렀다.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자 건원릉 서쪽에 산릉을 조성하고 목릉이라 하였으나, 병풍석이 무너지고 기울어지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생기자 1630년에 선조의 목릉을 유릉의 서남쪽으로 천릉하여 정자각을 하나로 합치고 유릉과 합하여 목릉이라 불렀다. 1632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승하하자 선조의 능침 동남쪽에 안장하고 혜릉이라 하였다. 세 개의 능을 합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고 목릉은 같은 영역에 세 개의 능침이 있는 동원삼강릉이 되었다.
목릉의 형태와 특징
목릉은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세 개의 능침이 하나의 영역에 각각의 언덕으로 조성된 곳으로, 광릉의 정례를 따라 한 골짜기에 왕과 왕후의 능침이 언덕을 달리하여 형성되면 능침의 중심부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고 재례를 지내도록 정하였다. 그 규례에 따라 선조의 능침 앞에 정자각을 정전 3칸에 배위청 2칸으로 세우고, 의인왕후와 인목왕후의 능침에서 신로를 연결하여 한 곳에서 재례를 지내도록 하였다.
목릉은 홍살문주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향으로와 정자각에서 각 능침까지 이르는 신로가 구불구불 부정형으로 연결되어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단릉과 비교되는 특징이 있다.
조선 14대왕 선조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 조와 하동부대부인 정 씨의 셋째 아들로 1552년 11월 11일 한성 인달방에서 태어났다. 비는 박응순의 딸 의인왕후이고, 계비는 김제남의 딸 인목왕후이다. 명종의 사랑을 받았으며 성장하자 하성군에 봉해졌는데 1567년(명종 22)에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년에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매일 강연에 나가 경사를 토론하였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였으며 만년에는 <주역> 읽기를 좋아했다.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여 이황과 이이 등을 극진하게 예우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주력하였다. 당시 문사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있는 데다 관리를 뽑는 데도 과거에 의거해 선비의 습속이 문장에만 치우 져져 있었다. 이러한 병폐를 없애고자 학행이 뛰어난 사람을 발탁하고, 각 고을을 순행하며 교회에 힘쓰도록 하였다.
유일을 천거토록 하여 유능한 인재들을 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초서 하기도 하였으며, 치도에 관계되는 서적과 윤리와 기강을 기르기 위한 <삼강행실도>를 간행하도록 하고, 이 것을 널리 읽히도록 하였다.
선조대에 들어와 정국을 주도하던 사람들은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김효원, 심의겸을 각각 중심으로 하는 당쟁을 벌여 동인 대 서인으로 분당되었으며, 정론이 둘로 갈라져 조정이 시끄럽게 되었다. 1591년 세자책봉 문제로 집권한 동인도 서인에 대한 논죄 문제로 남북으로 다시 분열되어 정계는 당쟁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각 고을이 침략당하고 도성이 무너지자 개성으로 물러났다 평양으로 퇴각했으며, 임진강의 방어선도 무너져 의주로 피난하면서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세자 광해군에게 분조를 설치하게 하여 의병과 군량 확보에 치중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적의 후방을 공격했고, 무기력했던 관군도 전력을 가다듬어 왜군을 물리쳤다. 바다에서는 이순신 등 우리 수군이 해상을 완전히 장악했고, 명나라 원군이 와서 우리 관군과 함께 싸워 빼앗겼던 평양성을 되찾았다.
권율의 행주대첩에서 사기가 꺾인 왜군이 1593년 4월에 한성에서 철수하여 남으로 퇴각하였다. 10월에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다음 해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강화시키고, 투항해 온 왜군에게 조총 쏘는 방법과 탄환 만드는 기술을 관군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
군공사목을 규정하여 군공을 세운 자는 신분에 따라 응분의 논공을 시행하는 등 비상책을 강구하였으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명나라 원군이 오래 머물게 되어 군량미 조달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게 되자 납속사목을 설치하도록 하여 군공을 세운자나 납속을 한 자는 논공을 할 때 공명첩이나 실직을 주도록 하였다. 그러자 하층 신분을 가진 자가 양반으로 격상되는 일이 많아져 조선 후기 신분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 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깨지고 왜군이 재차 침입하자, 다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한편 관군의 정비를 촉구하였다. 1604년 왜란이 끝난 뒤 호성, 선무, 청난 등의 공신을 녹훈하여 전쟁의 마무리를 짓고 전후 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흉년이 거듭되었고 동인 : 서인의 당쟁은 더욱 심해져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선조는 죽기 직전에 측근을 불러 적자 영창대군을 보필해 달라고 유언하였으나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영창대군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만 가져오게 되었다.
선조는 조선의 제14대 왕으로 1567년 7월 3일부터 1608년 2월 1일까지 41년간 재위했다. 즉위 초부터 사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하고 중용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하였으나 사람들은 파벌로 갈라져 당쟁이 날로 극심해져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과 1592년 임진왜란에 뒤 이은 정유재란으로 나라 전체가 황폐해지는 수난을 겪었다. 선조는 개국 이래 내외적으로 가장 혼란한 상황을 맞은 불운의 왕으로 성종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왕 중의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조의 비 의인왕후
본관은 반남박 씨이며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전주이 씨 이수갑의 딸이다. 1569년(선조 2)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치렀으며 성품이 후덕하고 인자하였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였던 광해군과 함께 평양으로 피란하였다. 1593년 관군이 한양을 수복하자 한양으로의 환도에 선조와 함께 가지 못한 의인왕후는 해주에서 묘사와 신주를 모신 광해군과 함께 머무르다 1595년(선조 28) 의인왕후의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중전의 환도를 사간원에서 청하여 11월 10일 환궁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수안으로 피란하여 그곳에 머물렀으나 병이 들어 위중하기까지 하였다. 1599년(선조 32) 윤 4월에 한양으로 환도하였으나 1600년(선조 33) 6월 27일 경운궁에서 향년 46세로 후사를 출산하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선조는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비망기를 내려 죽음을 추모하였다. 시호는 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이며, 능호는 처음에는 유릉(裕陵)이었다가 나중에 목릉으로 합쳤다.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본관은 연안이며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 씨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 15세에 선조의 계비가 되어 1603년에 정명공주를 낳고,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가 사망한 후 대비로서 언문지교를 내려 광해군을 왕위에 오르도록 하였다. 1613년(광해 5)에 7명의 서자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계측옥사로 영창대군이 유배길에 살해되고, 아버지 김제남과 형제들도 사사되었다. 인목왕후는 폐위되어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었다. 이는 훗날 광해군에게 폐륜이라는 올가미로 작용하여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서궁 유폐 생활 10년이 된 1623년 3월 13일 인조가 반정을 마무리하고 신하를 보내 즉위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인목왕후는 즉시 응하지 않았다. 이에 인조가 직접 서궁으로 가서 승인을 간청하자 비로소 광해군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약속받고 어보를 내 주었다. 인목왕후는 직접 인조를 서궁에서 즉위하게 하였고. 창덕궁이 아닌 서궁에서 즉위가 이루어진 것은 인목왕후가 대비권을 행사하려는 의지로 인한 것이었다. 1632년 8월 13일 인경궁 흠명전에서 향년 47세로 승하하였다.
인목왕후는 대왕대비로 복권된 후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명하며 한글로 교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해서체로 쓴 족자인 <인목왕후어필칠언시>와 금강산 유점사에 친필로 쓴 <보문경>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으며, 인목왕후필적첩이 남아 있다.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이고, 능호는 혜릉(惠陵)이었다가 목릉으로 합쳐부르게 되었다.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 족자는 경기도 안산시 죽산면 칠장사에 보존되어 있으며 2010년 1월 4일 보물 제627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