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조 이성계는 누구인가?
1335년(고려 충숙왕 4) 음력 10월 11일에 주촌 환조와 이혜앙후 최 씨의 아들로 화령부 사저에서 태어난 그는 고려 공민왕대에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켜 벼슬길에 올랐고,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침입 시 공을 세워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고려 우왕 즉위 후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에서는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에 요동 정벌에 합류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한 뒤 창왕을 옹립했습니다. 이후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1392년 음력 7월 16일에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 그는 이듬해에 국호를 '조선'이라 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여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하였습니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승유역불 정책을 펼쳤으며,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아들들의 권력 다툼을 보게 되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왕의 자리를 정종에게 양위하게 됩니다. 태종 즉위 후엔 태상왕이 되었으며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습니다. 1408년(태종 8) 5월 24일에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태조고황제'로 추존되었습니다.

◆ 건원릉 이야기
1. 능의 역사
1408년 5월 24일 태조 이성계가 창덕궁 별궁에서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태종은 풍수지리에 밝은 신하들에게 능 자리를 찾게하였고,여러곳을 물색하던 좌의정 하륜의 추천에 따라 6월 28일에 양주 검안산(지금의 구리시)에 능지를 정하고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산릉공사를 위하여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였고, 9월 7일 태종이 변전에 나가 견전례를 행하고 공식적으로 발인하였습니다.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에 본인의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으나, 태종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왕자의 난으로 즉위하면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옮기고 묘로 격하시키는 한편, 태조의 능을 새로운 자리에 조성하여 왕조의 정통성을 재확립하고 왕실의 권위를 세우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삼기 위하여 지금의 자리에 1408년 9월 9일에 건원릉이 조성하였습니다.
이는 곧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이 되었으며, 이후 조선 왕릉 제도와 배치 양식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2. 능의 구성
건원릉은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었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인 석물의 조형과 배치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봉분에는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덮었는데 인조실록에 태조의 유교에 따라 억새를 덮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능침은 12면의 병풍석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십이지신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방울)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으며 석호와 석양은 밖을 향하고 있는 형상으로 수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봉분 앞의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다섯 개가 놓여 있고, 양 옆으로는 망주석이 한 걔씩 서있습니다. 중계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정중석이 있습니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 위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신도비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3. 건원릉 야사
건원릉의 봉분은 다른 왕릉과 달리 억새풀이 무성한데, 이는 태조 이성계가 죽으면서 고향 함흥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지만 태종 이방원은 개국 시조인 부왕을 멀고 먼 함흥 땅에 안장한다면 나라의 위신과 제사 지낼 때 불편하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 모셔야만 자기의 정통성을 확보할 있으니 도성 근처에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언에도 부합하고자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을 덮는 꼼수로 건원릉을 단장했다고 합니다. 신덕왕후를 무척 싫어하던 이방원이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새로 자리를 알아봐 다른 곳에 묘를 썼다는 죄책감에 평소 고향을 그리던 부왕을 위해 고향인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함흥에서 억새를 가져올 때 시간이 많이 걸려서 억새가 다 말라죽으므로 사람들을 일열로 세워서 함흥에서 한양까지 억새를 릴레이식으로 운반해서 심었다는 설화도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건원릉에 여러번 불을 질렀으나 매번 정자각에서 엄청난 바람이 나와 불을 다 꺼버렸다고 합니다.
4. 전통 계승과 후대의 관리
건원릉은 억새 봉분을 보존하기 위해 다른 왕릉과 달리 1년에 단 한 번, 한식에만 억새를 베는 '청완예초의'라는 전통 의례를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조선 왕조 내내 건원릉은 동구릉의 으뜸 능으로서 역대 왕들의 지극한 관심을 받았습니다. 영조와 정조같은 후대 왕들은 건원릉을 직접 찾아 제향을 올리고 능의 석물과 건물들을 수리하는 등 각별하게 관리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건원릉은 600여 년의 세월 동안 그 원형을 잘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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