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하르방의 스토리 블로그(Grandfather's Story Blog)입니다.
조선왕릉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역대 왕들의 무덤에 얽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조선을 건국한 초대 임금인 태조 이성계의 무덤은 경기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의 9개 능묘 중 하나입니다. 구리 동구릉은 9개의 능묘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시대의 왕릉군으로 역사적 배경 및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동구릉의 역사적 배경 및 문화적 의미와 가치
1. 동구릉의 역사적 배경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은 1408년(태종 8) 초대 임금인 태조가 승하하자 이곳에 장래를 지내고 건원릉이라 이름하였고,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총 9개의 왕릉이 조성되었다. 이곳을 왕릉으로 택지 한 사람은 무학대사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 1855년(철종 6)에 추존 문조(익종)의 수릉이 조성되기 전까지는 동오릉, 동칠릉으로 부른 사실이 실록에 남아있다. 동구릉은 건원릉 -> 헌릉 -> 목릉 -> 숭릉 -> 휘릉 -> 혜릉 -> 원릉 -> 경릉 -> 수릉 등으로 조선시대 왕릉군 중에서 가장 많은 무덤이 있는 곳으로 시대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2, 문화적 의미와 가치
동구릉의 봉분은 돌로 둘러싸인 정각식 형태로, 둘레에는 아름다운 돌기둥과 석조동물 등이 조성되어 있어 전통적인 조선시대 왕릉의 건축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그 당시의 예술과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동구릉에서는 각 무덤의 형태에 따라 단릉, 쌍릉, 동원이강릉, 합장릉, 삼연릉과 같은 형식의 왕릉을 볼 수 있는 데 특히 삼연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며, 동구릉에서만 볼 수 있는 신기한 형식이기도 하다.
이렇듯 조선왕조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구리 동구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2월 27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 건원릉 이야기
태조 이성계
1335년(고려 충숙왕 4) 음력 10월 11일에 주촌 환조와 이혜앙후 최 씨의 아들로 화령부 사저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 공민왕대에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켜 벼슬길에 올랐고,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침입 시 공을 세워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다, 고려 우왕 즉위 후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에서는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에 요동 정벌에 합류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한 뒤 창왕을 옹립했다. 이후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1392년 음력 7월 16일에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에 국호를 조선이라 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여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하였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승유역불 정책을 펼쳤으며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아들들의 권력 다툼을 보게 되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왕의 자리를 정종에게 양위하였다. 태종 즉위 후엔 태상왕이 되었으며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다. 1408년(태종 8) 5월 24일에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태조고황제로 추존되었다.
건원릉 이야기
1. 능의 역사
1408년 5월 24일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 하륜 등이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6월 28일에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 검암산에 능지를 정하고 7월부터 산릉공사를 위하여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였다. 9월 7일 태종이 변전에 나가 견전례를 행하고 공식적으로 발인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 본인의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으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여 건원릉이라 하였다.
2. 능의 구성
건원릉은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었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인 석물의 조형과 배치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주고 있다. 봉분에는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덮었는데 인조실록에 태조의 유교에 따라 억새를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능침은 12면의 병풍석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십이지신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방울) 등이 새겨져 있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밖을 향하고 있는 형상으로 수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봉분 앞의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다섯 개가 놓여 있고, 양 옆으로는 망주석이 한 걔씩 서있다.
중계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정중석이 있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 위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신도비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3. 건원릉 야사
건원릉의 봉분은 다른 왕릉과 달리 억새풀이 무성한데, 이는 태조 이성계가 죽으면서 고향 함흥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지만 태종 이방원은 개국 시조인 부왕을 멀고 먼 함흥 땅에 안장한다면 나라의 위신과 제사 지낼 때 불편하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 모셔야만 자기의 정통성을 확보할 있으니 도성 근처에 모시려고 했다. 그래서 유언에도 부합하고자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을 덮는 꼼수로 건원릉을 단장했다고 한다.
또, 이성계는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있는 정릉에 함께 묻히기를 원했지만, 신덕왕후를 무척 싫어하던 이밥원이 유언을 무시하고 새로 자리를 알아봐 다른 곳에 묘를 썼고, 죄책감에 평소 고향을 그리던 부왕을 위해 고향인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함흥에서 억새를 가져올 때 시간이 많이 걸려서 억새가 다 말라죽으므로 사람들을 일려로 세워서 함흥에서 한양까지 억새를 릴레이식으로 운반해서 심었다는 설화도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건원릉에 여러번 불을 질렀으나 매번 정자각에서 엄청난 바람이 나와 불을 다 꺼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