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GSB(Grandfather Story Blog)의 주인장 여니하르방입니다. 조선왕릉에 대한 오늘의 이야기는 구리 동구릉의 9개 왕릉 중에서 두 번째 왕릉인 조선 5대왕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문종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나 7세의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30년 간 세종을 보필하다가 37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2년 4개월 만인 39세에 병사하고,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하게 되는 가슴아린 사연으로 연결됩니다.
조선 5대왕 문종과 현덕왕후
문종의 이름은 향(珦)이며, 호는 휘지(輝之)이다. 1414년 10월 3일 세종과 소헌왕후의 장자로 태어나 1421년 7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년 조선 5대 왕위에 오른 문종은 조선 건국 이래 최초로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 케이스이다. 학문을 좋아하고 인품이 관후하여 세자로 있는 동안 문무관리를 고르게 등용하도록 하고, 언로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파악에 힘쓰는 등 세종을 보필하였다. 1445년 세종이 병들자 대신하여 국사를 처리하였으며 1450년 왕위에 오른 지 2년 4개월 만인 1452년 5월 14일 39세의 나이로 경복궁 강녕전에서 승하하였다. 문종은 세종 때부터 정비되어 온 정치제도의 틀을 잘 준수하며 국정을 이끌었으며, 천문학과 산술에 뛰어나 세계 최초의 정량적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언론의 활성화와 역사책 편찬, 병법의 정비 등으로 다양한 문헌에 그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현덕왕후는 문종의 왕비로 시호는 '인효순혜현덕왕후'이다. 권선의 딸로 본관은 안동이며, 후궁으로 들어왔다가 세자빈으로 승격되었다. 1441년 원손(단종)을 낳은 후 하루 만에 산후병으로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경기도 안산에 묻혔다. 문종이 즉위하자 현덕빈을 현덕왕후로 추숭하고 소릉이라는 능호를 내렸다.
현릉(동원이강릉)의 역사와 유래
현릉은 조선 5대왕 문종과 문종의 부인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 씨의 무덤으로 동원이강릉 형식이며, 구리시 인창동 산 2-1번지 동구릉지역에 건원릉 다음으로 조성되었다. 현릉은 본래 단릉으로 조성되었으나 이듬해 현덕왕후의 소릉을 이장하면서 동원이강릉이 되었다.
문종이 1452년 5월 14일 경복궁 강녕전에서 승하하자 영의정 황보인을 국장을 총괄할 총호사로 임명하고, 김종서, 정분, 민신, 이사철, 이사임 등을 산릉도감 및 제조로 임명하였으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도 적극 참여하였다. 세종이 자신의 무덤을 헌릉 곁에 미리 정했던 것처럼 문종도영릉의 근처에 묻히고 싶어 했으므로 5월 23일에 영릉의 근처 이목동을 택하여 땅을 파 보니 물이 솟았고, 다시 서쪽으로 옮겨 파 보았으나 돌이 나와 산릉으로 쓸 자리가 없었다.
결국 건원릉의 동남쪽 언덕으로 최종 결정하였고, 산릉의 터를 정하는 동안 석실에 쓸 석재를 영릉까지 옮겨 왔으나 능터가 건원릉으로 옮겨지자 대형 석재를 다시 건원릉까지 옮겨야 했다. 석재들을 옮기는 데 8천여 명이 동원되었다고 하며 한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는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1452년 9월 1일 국장이 이루어졌다.
현덕왕후는 1441년(세종 23)에 단종을 낳고 병을 얻어 문종보다 11년 먼저 세상을 떠나 안산의 소릉에 묻혔다. 단종의 복위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에 서인으로 폐후되어 소릉을 바닷가로 이장되었다. 1512년(중종 7)에 신분이 복위되어 다음 해 봄 안산의 바닷가에 있던 소릉을 문종이 묻혀있는 현릉 동쪽으로 이장하였다.
현릉의 건립양식 및 특징
<국조오례의>의 본이 된 영릉(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의 형식을 따라 왕과 왕비의 능침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각각 세우고, 그 중간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운 동원이강릉 형식이다. 정자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의 능이 문종,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으로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 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어 놓았다.
석실을 갖추고 병풍석을 둘렀는데 병풍석에는 이전의 왕릉에 있었던 방울 방패 무늬가 사라지고 구름무늬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었으며, 상석을 받치는 고석도 5개에서 4개로 줄었다. 묘역 가장 아랫단에는 머리, 눈, 코가 큼직하고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선 무인석이 있고, 튀어나온 눈과 콧수염 등이 이국적인 문인석이 있다.
정자각은 문종릉과 현덕왕후릉 사이에 배치하고 좌향은 왕릉의 방향을 따라 자리 잡았으며, 왕과 왕후의 제향을 함께 모셨다. 정자각 남쪽에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있었으나, 현재는 수복방의 건물터만 남아있다.
문종 이전의 왕릉에는 신도비를 세웠기 때문에 현릉을 건립할 때도 비석을 만들기 위해 충주에서 석재를 채취하여 준비하였으나, 논의 끝에 비석을 세우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후로 조선 왕릉에는 신도비를 건립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