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이야기 : 원릉(元陵)
원릉은 구리시 동구릉에 일곱 번째로 조성된 조선 제21대 왕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무덤입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있습니다.
원릉의 역사적 배경
영조는 계비 정성왕후가 묻힌 서오릉의 홀릉에 묻히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가 현 위치에 능지를 정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 위치는 원래 효종의 능인 영릉이 있었던 자리였으나 영릉은 1673년(현종 14)에 여주로 옮겨졌다.
영조는 1776년 승하하여 7월 27일에 현 위치에 안장되었으며, 정순왕후는 원릉을 조성한 지 29년 후인 1805년(순조 5) 6월
20일에 영조 옆에 안장되었다.
원릉의 형식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난간석이 두 릉을 감싸고 있으며 봉분을 감싸는 병풍석은 설치되자 않았다.
각 봉분 앞에 혼유석이 1좌씩 놓여 있고, 혼유석 좌우로 받침에 꽃문양을 새긴 망주석 1쌍이 있다. 석양과 석호가 각 2쌍,
문인석과 석마가 각 1쌍, 장명등, 무인석과 석마가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이 능은 18세기 후반의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석인상의 얼굴은 온화하고 망주석의 세호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정성왕후는 1693년 1월 2일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태어났으며, 1704년에 연양군(훗날 영조)과 혼인하여 1724년에 영조가 조선 제21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정성왕후로 책봉되었다. 조선 역대 왕비 중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왕비로서 어질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식을 낳지 못한 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고, 고양시 서오릉의 홍릉에 묻혀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정순왕후는 김한구의 딸로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노론 백파계 집안 출신으로 51세 연상인 영조와 나이 차가 많았으
며, 오빠인 김귀주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여 정조 시대에는 수렴청정을 주도하고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등 정치적 변화와 논란적인 사건들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1745년에 태어나 1805년에 사망하였고 자식을 낳지 못했다.
영조삶과 업적
영조는 1694년 10월 31일 숙종과 숙빈 최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를 모시던 몸종 무수리 출신이었다. 숙종의 아들로 왕세자가 아닌 경종의 이복동생으로 조선 제21대 왕위에 오른 영조는 1724년부터 1776년까지52년간 왕위를 지켰으며, 손자 정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끌었다.
1). 탕평책과 민생 안정 : 조선사회를 개혁한 계몽군주로서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거나 개정하여 민중들이 인권을 존중받도록 했으며,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서 민중들이 억울한 일을 직접 알리게 했다.
2). 국정 개혁과 문물 정비 : 금주령을 내려 사치와 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에 힘썼다.
3).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인좌의 난 : 형제와의 당쟁, 권력의 소실, 그리고 부모의 출생 콤플렉스와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국정 안정과 민생을 위해 노력했다.
영조는 조선 역사상 중요한 왕 중 하나로 평가되며, 그의 지혜와 리더십은 시대를 중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조선 왕들 중 가장 긴 재위 기간으로 장수 한 군주로 81세에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