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이야기 : 수릉(綏陵)
구리 동구릉에 마지막으로 조성된 수릉은 문조와 신정왕후 조씨의 능으로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입니다. 일반적인 왕릉은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왕(남자)이 왼쪽, 왕비(여자)가 오른쪽에 모셔지지만 수릉은 반대로 모셔져 있어 이례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왕릉입니다
조선 후기 왕실의 애환을 담은 능
조선 왕조의 역사를 보면 오랜 동안 왕위를 지키지 못했거나 아예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물들도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문조(효명세자)입니다.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인 그는 짧은 생애에서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정국을 이끌었던 중요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는 아버지 순조의 건강이 악화되자 1827년부터 대리청정을 맡아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830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왕위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의 시호는 문조이며,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추존된 왕으로 기록됩니다.
수릉의 역사적 배경 및 형식
문조는 효명세자의 신분으로 1830년(순조 30)에 세상을 떠나 경종의 의릉 왼쪽에 연경묘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었다가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1846년(헌종 12)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서울 광진구 용마산)으로 이장하였다. 1855년(철종 6)에 다시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현재의 동구릉에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 되었습니다.
수릉은 합장릉의 형식으로 봉분이 나란히 조성된 쌍릉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왕과 왕비의 합장능이 대부분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단릉이 많아지는 추세였습니다. 병풍석이 없이 간결한 원형의 봉분 구조를 보이며, 석물 또한 소박하며 화려한 장식 대신 절제된 분위기를 강조합니다.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 기본 석물만 배치되어 있고,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의 형태인데 이는 연경묘 시절에 만들어진 문석인으로 동구릉 중 유일한 형태입니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2개의 표석이 있는데 하나는 익종대왕과 신정왕후의 표석이고, 다른 하나는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표석입니다.
문조는 효명세자로서 왕세자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훗날 추존왕으로 봉해졌으며, 처음에는 단릉으로 조성되었다가 신정왕후가
1890년(고종 27)에 세상을 떠나자 합장하면서 쌍릉 형식이 되었습니다.
수릉의 역사적 가치
1. 추존왕의 능
● 수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도 보기 드문 '추존왕의 능'입니다
● 문조는 실제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나, 효명세자로서 정치에 참여한 짧은 기간 동안 정치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 효명세자의 죽음 이후 헌종이 즉위했고, 문조는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어 능호를 '휘릉'이라 했습니다.
2. 신정왕후의 정치적 위상
● 신전왕후 조씨는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했습니다.
● 대비로서 조선 말기 정치사의 중대한 국면에 관여했으며, 대한제국 성립까지 생존하여 조선 왕실의 격동기를 지켜본 인물입니다
● 따라서 수릉은 조선 후기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가는 시대적 전환의 상징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3. 세계 문화적 가치
● 동구릉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수릉은 조선 후기 왕릉의 간소화된 형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왕권이 무너지고 재정이 어려워지던 시기의 건축적 특징과 미학적 흐름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문조(文祖) 이야기
문조는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아들로 1809년(순조 9)에 창덕궁 대조전에 태어났다. 1812년(순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19년 10월에 풍양 조씨(후일 신정왕후)와 가래를 올렸다. 1827년(순조 27)에 아버지 순조를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다. 당시 외척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으나 왕세자는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소외 당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고,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으며 실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류하여 견문을 넓히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궁중연회에 쓰이던 춤과 노래인 정재를 발전시켜 악장, 치사, 전문 등을 직접 지었고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했다. 1830년(순조 30)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효명세자라 하였다. 이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효명세자는 문조 또는 익종으로 불리었고, 순조 9년 1809년 10월 8일에 태어나서 순조 30년 1830년 5월 6일 사망했으며, 헌종의 아버지로서 조선의 추존왕이고 대한제국의 추존황제이다.
신정왕후(神貞翼皇后) 이야기
신전왕후 조씨는 본관이 풍양인 풍은 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송씨의 딸로 1808년(순조 8)에 두포 쌍호정 사저에서 태어났으며, 1819년(순조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27년(순조 27)에 헌종을 낳았다. 효부라는 칭찬을 듣던 왕세자빈은 불행히도 헌종을 낳은지 3년 만에 남편 효명세자를 잃었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고, 1857년(철종 8)에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종친 흥선군 이하용의 둘째 아들(고종)을 양자로 입양시켜 왕위에 올렸으며, 고종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여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하였다. 남편 문조가 이루지 못한 뜻을 이어받아 흥선대원군과 함께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등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1866년(고종 3)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 살다가 1890년(고종 27) 경복궁 흥복전에서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정왕후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 속에서 왕실의 권위를 지키고 왕조를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최장수 왕비로 기록되어 있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신정익황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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