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이야기 : 수릉(綏陵)
구리 동구릉에 마지막으로 조성된 수릉은 문조와 신정왕후 조씨의 능으로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
이다. 일반적인 왕릉은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왕(남자)이 왼쪽, 왕비(여자)가 오른쪽에 모셔지지
만 수릉은 반대로 모셔져 있다.
수릉의 역사적 배경 및 형식
문조는 효명세자의 신분으로 1830년(순조 30)에 세상을 떠나 경종의 의릉 왼쪽에 연경묘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었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 하였다. 그러나 1846년(헌종 12)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서울 광진구 용마산)으로 이장하였다. 1855년(철종 6)에 다시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현재의 동구릉에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 되었으며, 1890년(고종 27)에 신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수릉에 합장되었다.
수릉은 합장릉의 형식으로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의 형태인데 이는 연경묘 시절에 만들어진 문석인으로 동구릉 중 유일한 형태이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2개의 표석이 있는데 하나는 익종대왕과 신정왕후의 표석이고, 다른 하나는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표석이다.
문조(文祖) 이야기
문조는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아들로 1809년(순조 9)에 창덕궁 대조전에 태어났다.
1812년(순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19년 10월에 풍양 조씨(후일 신정왕후)와 가래를 올렸다. 1827년(순조 27)에 아버지 순조를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다. 당시 외척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으나 왕세자는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소외 당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고,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으며 실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류하여 견문을 넓히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궁중연회에 쓰이던 춤과 노래인 정재를 발전시켜 악장, 치사, 전문등을 직접 지었고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했다.
1830년(순조 30)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효명세자라 하였다. 이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효명세자는 문조 또는 익종으로 불리었고, 순조 9년 1809년 10월 8일에 태어나서 순조 30년 1830년 5월 6일 사망했으며,.
헌종의 아버지로서 조선의 추존왕이고 대한제국의 추존황제이다.
신정왕후(神貞翼皇后) 이야기
신전왕후 조씨는 본관이 풍양인 풍은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송씨의 딸로 1808년(순조 8)에 두포 쌍호정 사저에서
태어났으며, 1819년(순조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27년(순조 27)에 헌종을 낳았다.
효부라는 칭찬을 듣던 왕세자빈은 불행히도 헌종을 낳은지 3년 만에 남편 효명세자를 잃었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고, 1857년(철종 8)에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종친 흥선군 이하용의 둘째 아들(고종)을 양자로 입양시켜 왕위에 올렸으며, 고종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여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하였다. 남편 문조가 이루지 못한 뜻을 이어받아 흥선대원군과 함께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등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1866년(고종 3)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 살다가 1890년(고종 27) 경복궁 흥복전에서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신정익황후로 추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