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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 이야기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의 생애와 역사적 비화

by 하르방 스토리 2026. 7. 24.

 

 

 

 

격동의 개화기와 열강의 이권 침탈 속에서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인물, 바로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제였던 고종입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로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긴 무능한 군주'라는 비판과 '열강 사이에서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저항했던 비운의 황제'라는 옹호가 극명하게 갈리곤 합니다. 강화도 농사꾼 출신인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의 삶과, 대한제국 탄생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상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어린 임금의 즉위와 흥선대원군의 섭정

1863년,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이 후사 없이 서거하자 왕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때 왕실의 대모였던 조대비(신정왕후)와 흥선군(흥선대원군)의 정략적 연합을 통해 흥선군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명복(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어린 왕을 대신해 실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약 10년간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 세도정치 타파: 안동 김씨 등 특정 가문이 독점하던 권력을 분산시키고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 민생 안정 및 재정 확충: 서원을 철폐하여 유생들의 폐단을 막고, 양반에게도 세금을 거두는 '호포제'를 실시했습니다.
  • 통상수교 거부 정책: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며 쇄국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원군의 정책은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며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조선은 본격적인 개화와 함께 격동의 시련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2. 대한 제국 선포: 조선이 아닌 '황제의 나라'로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참혹하게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감행합니다. 이는 주권국가의 왕이 타국 공사관에 피신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을 이용해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종의 고육지책이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현재의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대한제국'을 선언하며 황제에 즉위합니다.

  • 국호 '대한(大韓)'의 의미: 고구려, 백제, 신라 및 삼한(마한, 진한, 변한)을 모두 통합한 자주적이고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뜻합니다.
  • 황제국의 의미: 청나라 중심의 사대주의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 조선이 서구 열강들과 대등한 자주독립국임을 세계에 선포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황제에 오른 고종은 '광무개혁'을 통해 군제 개혁, 토지 조사 사업(양전 사업), 근대적 공장 및 회사 설립, 교육 기관 확충 등 다방면에서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3. 고종을 둘러싼 대표적인 비하인드 스토리

1) 한국 최초의 커피 마니아와 독다 사건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접한 고종은 이후 열렬한 커피 애호가가 되었습니다. 궁으로 돌아온 후에도 덕수궁 내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을 짓고 외국 공사들과 연회를 열며 커피(당시엔 '가비'라 불림)를 즐겼습니다.

 

1898년에는 고종을 독살하려 한 '김홍육 독다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김홍육이 유배를 당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궁중 요리사를 포섭해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다량의 타륨(독약)을 탔던 사건입니다. 그러나 평소 커피 맛을 잘 알고 있던 고종은 한 모금을 마시자마자 이상함을 느끼고 뱉어내 목숨을 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함께 커피를 마신 황태자(순종)는 이를 삼켜 치아가 다 상하는 등 큰 후유증을 겪었습니다.

 

2) 헤이그 밀사 파견과 강제 퇴위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빼앗자, 고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의 밀사를 파견합니다.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밝히고 일제의 침략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한 필사의 노력이었으나, 강대국들의 냉혹한 외면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일제는 이 사건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그의 아들인 순종을 임금으로 세웠습니다.

 

4. 비운의 황제가 남긴 역사적 유산

퇴위 후 덕수궁에서 태상황으로 지내던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럽게 서거했습니다. 당시 일제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이에 격분한 민족적 분노는 1919년 3·1 운동이라는 거국적인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격동의 한복판에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고종. 비록 강대국들의 이권 침탈과 일제의 국권 피탈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대한제국 선포를 통해 '왕의 나라'에서 '자주적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뿌리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종황제의 어진 (위키백과 제공)
위키백과 자료 고종황제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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