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의 끝자락에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파주 삼릉'을 다녀왔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중 하나인 이곳은 화려함보다는 고즈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감도는 듯했습니다. 다른 왕릉에 비해 유독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분들의 무덤이 울창한 숲의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애잔함으로 깊게 다가오는 곳이었습니다. 세 개의 능이 모여 있다는 뜻에서 삼릉이라는 명칭을 가진 파주 삼릉을 하나씩 둘러보며 그 특유의 애잔함과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 파주 삼릉은?
● 공릉(恭陵) :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의 능입니다. 그녀는 세자빈 신분으로 원손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불과 1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비로 추존되었지만, 능의 규모가 단출하여 그 짧았던 삶이 더욱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 순릉(順陵) :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의 능입니다. 공릉의 주인공인 장순왕후의 친동생으로, 그녀 역시 자녀 없이 18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 영릉(永陵) : 영조의 첫 번째 아들 효장세자와 세자빈 효순왕후의 능입니다. 효장세자는 불과 9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훗날 정조가 그의 양아들로 입적되면서 왕으로 추존되었습니다.
파주 삼릉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감정은 '안타까움'입니다. 이곳에는 조선 최고의 권력가였던 한명회의 두 딸과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와 세자빈의 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던 가문에서 태어나 왕실로 시집왔지만, 꽃다운 나이에 채 피지도 못하고 져버린 두 자매의 삶을 생각하며 걷는 숲길은 마음 한 구석을 아리게 하였고, 자식을 먼저 보낸 영조의 슬픔과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세자의 운명이 영릉의 소나무 사이로 애잔하게 흐르는 듯했습니다.

◆ 장순왕후 : 왕비가 되지 못한 세자빈의 눈물
● 애잔한 삶 : 한명회의 셋째 딸로 태어나 16세에 세자(훗날 예종)와 혼인하여 이듬해에 아들(인성대군)을 낳았으나 17세의 나이에 산후병으로 요절했습니다. 남편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생전에는 왕비의 칭호조차 써보지 못한 채 '장순빈'으로 불리다가 훗날 성종대에 이르러서야 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 전해지는 이야기 : 예종은 정실부인이었던 장순왕후를 잊지 못해 무척 그리워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녀가 죽고 난 뒤 예종이 쓴 제문에는 장순왕후의 성품이 온화하고 검소했음을 슬퍼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 공혜왕후 : 효심으로 기억되는 비운의 왕비
● 애잔한 삶 : 한명회의 넷째 딸이자 장순왕후의 친동생입니다. 언니에 이어 조선의 왕(성종)의 첫 번째 왕비가 된 그녀는 언니보다 1년을 더 살았지만 자녀도 없이 1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공혜왕후는 성격이 매우 너그럽고 효성이 깊었으며, 당시 궁궐에는 세 명의 대비(정희왕후, 인수대비, 인순왕후)가 있었는데, 이 까다로운 어른들의 수발을 완벽하게 들어 왕실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 전해지는 설화 : 공혜왕후가 병석에 누워 위독할 때 했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자신의 죽음 직감한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죽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대비 마님들께 끝까지 효도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는 것이 어른들께 걱정을 끼칠까 봐 아픈 기색조차 내지 않고 억지로 참아냈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성품을 짐작하게 합니다.
◆ 효장세자 : 못다 핀 세자의 꿈
● 영조의 통곡 : 효장세자는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얻은 귀한 첫째 아들로 영조는 유독 이 아들을 아꼈고, 그에 대한 기대도 남달랐다고 합니다. 그는 나이에 비해 총명하고 성품이 온화하여 영조의 큰 기쁨이었으며, 6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어 조선의 차기 왕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책봉 3년 만인 9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영조는 직접 세자의 묘비명을 쓰고,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는 기록이 조선왕실록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 어린 과부 : 효장세자의 부인 효순왕후의 삶은 더욱 애잔합니다. 그녀는 불과 8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와 혼인한지 불과 1년 만에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떠났지만 그녀는 고작 12살의 나이로 왕실의 며느리로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시아버지인 영조를 극진히 모셨고, 영조 또한 일찍 혼자가 된 어린 며느리를 안쓰럽게 여기며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내다 36세의 나이로 남편 곁으로 갔습니다. 죽어서야 비로소 남편 곁에 눕게된 것입니다.
● 정조의 법적부모가 된 사연 :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 영조는 손자인 정조를 죄인인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게 됩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친부인 사도세자가 아니라 일찍 죽은 큰아버지 효장세자를 왕(진종)으로 추존했습니다. 결국 효장세자와 효순왕후는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사후에야 정조의 효심 덕분에 왕과 왕비의 예우를 받으며 이곳 영릉에 잠들게 된 것입니다.
◆ 삶의 덧없음을 마주하다
파주 삼릉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며 느낀 것은 '기록되지 못한 슬픔'이었습니다. 왕실의 일원으로 화려한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실상은 너무도 짧은 생을 살다 간 주인공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까요.!! 파주 삼릉의 소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유독 바람 소리가 구슬프게 들립니다. 그것은 아마 17세,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구중궁궐의 무게를 견디다 잠든 두 자매 장순왕후와 공혜왕후의 못다 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벗어나, 역사 속 인물들의 삶을 반추하며 조용히 걷고 싶은 분들에게 이곳 파주 삼릉은 최고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와 함께 마은의 위로를 얻고 돌아온 하루였습니다.
● 파주 삼릉 관람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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