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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조선 16대 왕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 이야기.!!

by 여니하르방 202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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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릉은 구리시 동구릉의 네 번째로 조성된 왕릉으로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의 능입니다.

인조는 조선 16대 왕으로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와 함께 파주시 교하동에 위치한 장릉(長陵)에 묻혀있는데, 독수공방으로 살다가 간 장렬왕후는 죽어서도 왕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어린 나이에 인조의 계비가 된 장렬왕후의 생애와 휘릉의 역사 및 조선 16대 왕 인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장렬왕후의 생애

장렬왕후 조 씨는 1624년(인조 2)에 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 씨의 딸로 직산현(지금의 충남 천안) 관아에서 태어났으며, 1635년에 인조의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가 승하하자 삼년상을 마친 후 1638년(인조 16) 12월에 15살의 나이로 인조의 두 번째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후궁 소용 조 씨만을 가까이하여 그녀는 늘 뒷방 신세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후궁 조 씨의 농간으로 병에 결렸다는 오인을 받아 왕은 그녀를 더욱 멀리하게 되었고 1645년에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의붓아들 효종이 즉위하자 20대의 젊은 나이로 대비가 된 장렬왕후는 별다른 권력도 없이 조용히 지내는 것이 전부였으며 1651년에는 자의(恣懿) 존호가 추상되어 자의왕대비가 되었다. 이후 1659년 의붓아들인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에 대한 복상 문제로 서인과 남인 간에 대립이 생겼었고, 1674년(현종 15)에 며느리인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대비인 장렬왕후의 상복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 간에  또 다시 예송논쟁이 있었는데, 이 논쟁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당쟁으로 기록된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쓸쓸한 여생을 보냈으며 증손자 숙종 때인 1688년 9월 20일 창경궁 내빈원에서 6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휘릉의 역사  및 구성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으로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1688년(숙종 14)에 조성되었다.

능의 형식은 단릉 형식으로 봉분에는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고,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5개로 되어있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라간, 수복방, 어정, 홍살문 등이 배치되었는데 휘릉 정자각은 다른 왕릉의 정자가과 정전의 양 옆에 익랑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하였다고 한다.

 

능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며 매년 한식날에 제례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장렬왕후가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엷은 자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궁중에서 겪었을 어려움과 인내심을 짐작할 수 있게하며, 조선시대 여인들의 삶과 역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 16대왕 인조

본명은 이종(李倧)이다. 1595년 11월 7일 선조의 다섯 째 아들인 주촌 원종과 인헌왕후 구 씨의 맏아들로 임진왜란 피난 중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607년(선조 40)에 능양군에 봉해졌으며, 1623년 서인 정권과 함께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조선시대에 반정으로 왕위가 바뀐 것은 연산군을 폐한 '중종반전'과 광해군을 폐한 '인조반정'이 있는데, 중종이 정변을 일으킨 공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면, 인조는 왕이 되고자 직접 정변을 준비하고 때를 기다렸던 인물이다.

 

그는 1624년 반정공신책록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공주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관군의 도움으로 환도했다. 이후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여 항거하였으나 청나라에 항복해 삼전도에서 군신의 예를 맺게 되었다. 이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하자는 청나라의 요구를 수락하는 수난을 당하였다. 1645년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가 풀려나 북경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 의문의 변사를 당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정하지 않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김 씨를 사사했다.

 

그 후 1649년(인조27)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인열왕후, 장렬왕후이며 왕릉은 인열왕후와 함께 묻힌 합장릉 형식의 장릉(경기 파주)이다.

 

인조의 주요정책 및 업적

인조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정책을 수용했다. 난국 속에서도 군제를 정비해 1624년 총융청, 수어청 등을 북변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설치했다. 광해군 때 시험적으로 경기도에 실시한 대동법을 1623년에 강원도에도 확대 실시하고, 1633년에는 상평청을 설치해 상평통보를 주조했으며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였다. 1634년에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남에 토지조사를 실시해 전결 수를 늘려 세원을 확보했다.

 

인조는 학문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동사보편>, <황극경세서> 등의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송시열, 송준길 등 뛰어난 학자를 배출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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